다른 사람과의 만남으로 얻을 수 있는 신비로움을 생각할 때 / 김성은
“우리는 쿠르베의 그림 대신에 세잔의 그림을 벽에 걸 수는 있지만, 마흔일곱 번째 생일을 치르고 난 후에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 수는 없다. 만일 스물일곱 번째 생일에 앞으로 마흔일곱 번째 생일을 맞을 때 어떤 생각이 들 것인지 미리 안다면,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아주 다르게 지낼 것이다.” (백남준, 「비디오 암호 코드」, 1979)
백남준은 역행할 수 있는 기계의 시간과 역행할 수 없는 인간의 시간에 대해 논하는 이 글을 마흔일곱 번째 생일이던 해에 썼습니다. 흘러가버린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인 인간에게 비디오의 기술은 그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한다고 백남준은 말합니다. 그리고 샤를 보들레르의 「교감」, 아르튀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라는 시를 다매체 다방향 상응의 소통, 시간을 되돌리는 비디오의 철학적 문학적 상징으로 인용합니다. 그렇지만 “삶의 베타맥스에 되감기 버튼이란 없다”는 점을 백남준도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 아쉬움이 2020년 7월 20일 백남준의 생일에 유독 크게 느껴집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매년 백남준의 생일이면 크고 작은 축하의 자리를 마련하곤 했습니다. 생일에 맞춰 여름 전시의 개막식을 열 때면 함께 모인 사람들로 북적이는 미술관은 자연스럽게 생일 잔치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10년 전인 2010년 백남준의 일흔 여덟 번째 생일에는 백남준의 동료였던 플럭서스 작가 벤 패터슨의 신작 스코어 〈백남준에게 보내는 인사〉가 관객들과 함께 공연되었습니다. 관객들이 각자 이름의 알파벳 이니셜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무작위로 할당 받아 낭독합니다. 마치 주문처럼 구성된 문장은 패터슨의 ‘백남준 라디오’ 부스에서 백남준에게 보내는 생일 메시지로 녹음되었습니다. 작년에는 한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박승원과 함께 다시 한번 〈백남준에게 보내는 인사〉가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매년 7월 20일 백남준아트센터는 참 왁자지껄했습니다.
2020년의 우리는 코로나-19로 잔뜩 움츠러들어 있습니다. 서로에게 다가가기 보다는 거리를 두어야 마땅하고, 소리 내어 이야기하기 보다는 침묵하고 숨죽이는 게 안전하다고 여깁니다. 미술관도 오랜 시간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긴 휴관 끝에 이제 미술관이 다시 문을 열어도 좋다는 지침이 백남준의 생일에 전해졌습니다. 관객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는 소식이야말로 백남준이 가장 기뻐할 축하 인사이리라 믿습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예년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올해 백남준의 생일을 기립니다. ”백남준 전시 연구회”라는 제목으로 《NJP 아카데미》를 지난 주말부터 시작했습니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전시의 역사로 접근하는 강좌입니다. 온라인 화상회의와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진행합니다. 코로나 상황에 대처하는 대안에 머물지 않고 미디어 기술을 통해 대면의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자리로 만들고자 합니다. 비대면이 아니라 새로운 대면의 도모입니다. 새단장한 백남준아트센터 홈페이지에서도 보다 적극적인 공유의 활동을 펼치고자 합니다. 백남준이 1984년 만남과 소통의 위성 예술을 기획하며 말했듯이 새로운 생각을 발견하고 많은 생각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려고 합니다. 백남준의 생일에 이 글을 ‘NJP 채널’에 적는 것은 그 다짐입니다.
그리고 3월에 막을 올린 《백남준 티브이 웨이브》의 영상물을 제작해 백남준의 생일에 공개합니다. 영상에서 백남준으로 분한 박승원 작가가 전시의 곳곳을 재미있게 소개해 줍니다. 다시 문을 연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이 전시를 관람하다 보면 불쑥불쑥 백남준이 다가올 것입니다. 전인류가 처한 감염병의 위기 속에서 배타적이고 폐쇄적이 되어 가는 세상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백남준은 그렇지 않다고,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