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피아노와 편지>, 1960(피아노)/1962-1980(편지), 가변크기, 분해된 피아노, 백남준이 보낸 사진, 문서, 편지
전시
사과 씨앗 같은 것
2023. 4. 27. – 2024. 2. 12.
장소
백남준아트센터 제1전시실
참여작가
백남준,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만프레드 레베, 만프레드 몬트베, 알도 탐벨리니, 앨런 캐프로, 오토 피네, 저드 얄커트, 제임스 시라이트, 토마스 태들록
기획
조권진
그래픽/공간 디자인
장효진
교육
박선영
한편에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고, 다른 한편에 소통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가끔 그 둘이 그리는 곡선이 교차한다.(그러나 소통과 전혀 연관이 없는 예술작품도 수없이 많고, 예술적인 면이 전혀 없는 소통도 많다.) 그 지점에 사과 씨앗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어쩌면 우리의 꿈일지도 모른다. (백남준, 「임의접속정보」, 1980)
1980년 3월, 뉴욕 현대미술관의 학예사 바바라 런던이 기획한 <비디오 관점들> 시리즈의 하나로 백남준은 「임의 접속 정보(Random Access Information)」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다. ‘임의 접속’ 즉 ‘랜덤 액세스’는, 마그네틱테이프의 재생 방식처럼 순차적으로 정보를 읽어내는 것과 달리, 컴퓨터에서처럼 원하는 위치의 정보를 즉각적으로 읽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이 강연에서 백남준은 서로의 면이 겹쳐지는 두 개의 둥근 원을 그리고, 한쪽에는 예술, 다른 한쪽에는 소통이라고 쓴다. 그리고 두 원이 겹치는 가운데 부분에 사과 씨앗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한다. 당시 강연의 주제였고, 백남준의 꿈이라고 말한 이 씨앗은 무엇일까? 백남준은 이 씨앗을 비디오 아트가 가진 잠재성으로 보았다. 백남준은 인류 역사의 모든 시간 정보를 기록하고 보존할 수 있는 비디오에 임의 접속하는 것이 소통의 문제를 극복할 중요한 해결책이라고 믿으며, 이 씨앗을 움트게 하기 위해 무한하게 기록된 시간의 정보를 자르고 붙여서 비디오 아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공연이나 전시 관람객이 아닌 불특정한 범위의 확산이 가능한 텔레비전 시청자를 대상으로 방송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비디오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소통의 가장 큰 문제는 단절되는 것이다. 만날 수 없고 서로를 알 수 없으면 오해와 편견이 쌓여 통하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과 소통이 만나면 서로의 매개체가 되어 그 실행 방식이 다양해지고, 서로에게 강력한 도구가 되어 예측하지 못했던 곳에 이르게 한다. 시간을 재조합하여 편집하는 비디오 작업이 시공간의 구속을 벗어나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연결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 낼 것을 백남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백남준은 1963년 그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랜덤 액세스>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작품은 관객이 마그네틱테이프의 원하는 부분을 긁어 녹음된 음악 정보를 들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 관객의 참여로 소리를 만들 수 있었다. 비단 비디오 아트뿐만 아니라 예술과 소통이 서로 교차하여 일어날 수 있는 일의 무한한 잠재성을 품고 있는 이 씨앗 안에는 그가 예술을 시작한 이후 멈추지 않고 거듭해 온 전위적인 예술들이 그 자양분으로 쌓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시공간의 한계 없이 언제든지 접속하여 누구든지 만날 수 있고, 원하면 어떤 관계든 만들고, 발견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백남준의 사과 씨앗을 새롭게 싹 틔워야 할 때이다.
주최 및 주관
경기문화재단, 백남준아트센터
문의
kwonjin@njpartcenter.kr / 031-201-8546
《사과 씨앗 같은 것》
백남준, 알도 탐벨리니, 앨런 캐프로, 오토 피네, 제임스 시라이트,토마스 태들록,<매체는 매체다>
1969년 3월 23일 보스턴의 WGBH 방송국에서 방영한 〈매체는 매체다〉는 미국 최초의 비디오아트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6인의 작가가 참여하였다. “예술가들이 방송을 장악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텔레비전이 많은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어서 수백만을 위한 미술관을 바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프로그램은 알도 탐벨리니의 〈블랙〉, 토마스 태들록의 〈아키트론〉, 앨런 캐프로의 〈헬로〉, 제임스 시라이트의 〈카프리치오〉, 오토 피네의 〈일렉트로닉 라이트 발레〉, 마지막으로 백남준의 〈전자 오페라 1번>을 순차적으로 방송하였다. 5분 가량의 백남준 작품은 자신의 실험 텔레비전으로부터 직접 녹화한 다양한 댄싱 패턴, 닉슨 대통령과 변호사 존 미첼의 영상 푸티지, 그리고 카메라 세 대로 현장에서 촬영한 3명의 남성 히피와 여성 댄서의 모습을 교차 편집하여 우연적으로 생성한 이미지를 송출하였다.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환영처럼 보이는 영상처리 기법과, “이것은 참여 TV입니다” “눈을 감으세요” “2/3 눈을 뜨세요” 등 시청자 참여를 유도하는 내레이션을 특징으로 한다.
백남준, 저드 얄커트, <전자 달 2번>
1966년부터 백남준과 저드 얄커트는 <전자 달>을 공동 제작하였다. 빨강, 초록, 파랑과 같은 다양한 인을 가지고 달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장면을 얄커트가 영화 필름으로 촬영하였다. 흑백 영상으로 제작된 첫 번째 달은 그 자체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기도 하였고 전자적 간섭을 일으키면 반짝이기도 하였다. 이후 작품은 1967년에 필터를 사용하여 달 이미지에 색을 입히고 글렌 밀러의 <달빛 세레나데>를 음악으로 넣었다. 1969년 제작된 <전자 달 2번>은 달이 비치는 물결의 흑백 영상과 클로드 드뷔시의 <월광>을 배경음악으로 시작한다. 다양한 색과 모양의 달 이미지들이 반복되다가 백남준 얼굴 옆면이 달에 비치기도 하고 포크와 칼이 함께 놓인 접시 형태가 되기도 한다.
백남준, <바이바이 키플링>
백남준의 두 번째 위성 프로젝트, <바이바이 키플링>은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니, 그 둘은 절대 만나지 못하리라”라고 말한 영국의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을 반박하며 음악, 예술, 스포츠로 동양과 서양이 서로 만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86년 10월 5일 오전 10시부터 뉴욕, 도쿄, 서울을 동시에 연결한 생방송이 미국 WNET을 통해 송출되었고 이후 일본과 한국은 녹화방송 되었다. 이 작품은 비틀스의 <컴 투게더> 음악과 한국의 장구 공연, 키스 해링의 스케치 퍼포먼스, 동서양이 서로 연결되는 텔레비전 그래픽 등으로 구성된 도입부로 시작한다. 뉴욕과 도쿄가 이원 생중계를 위한 스튜디오가 되어, 각 장소에서 루 리드와 필립 글래스 앙상블이 공연하고 류이치 사카모토, 아라타 이소자키, 이세이 미야케의 음악, 건축, 패션이 소개되었다. 영상 전체는 농악, 차전놀이, 스모, 남대문 시장 상인 등 동양의 전통과 현대 문화를 보여주는 장면과 뉴욕과 도쿄 스튜디오의 공연 장면이 교차하여 삽입되는 가운데 중간중간 서울 아시안 게임의 마라톤 경주를 중계하였다. 마라톤의 결승전이 가까워질수록 필립 글래스 앙상블의 연주로 경주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며, 마지막은 도쿄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와 백남준의 <비디오 볼> 퍼포먼스로 마무리된다.
백남준, <글로벌 그루브>
백남준 비디오의 대표작으로 흥겹게 장단 맞춰 리듬을 탄다는 의미의 ‘그루브’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비언어적 의사소통 방식인 음악과 춤을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의 매체로 제시하며 여러 문화의 예술 형식의 활기찬 혼재로서 ‘지구촌’을 표현한 비디오이다. 1973년에 만들어지고 이듬해 1974년 1월 30일에 뉴욕 방송국 WNET을 통해 방송된 이 비디오는 “이것은 당신이 세계의 모든 방송국 채널을 돌릴 수 있고, TV 가이드가 맨해튼의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워지는 미래의 비디오 풍경이다.”라는 소개로 시작한다. 이어서 로큰롤과 나바호 원주민 여성의 북소리가 대구를 이루고, 한국의 부채춤과 탭 댄스가 섞이며, 샬럿 무어먼의 연주와 존 케이지의 인터뷰 장면 등이 연속적으로 나온다.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빠르게 돌리는 듯한 총 22개의 시퀀스는 아날로그 비디오 신디사이저로 만들었음에도 마치 디지털 영상처럼 보이게 하는 백남준 특유의 편집으로 세계 각국의 음악과 춤을 현란하게 보여준다.
백남준, <마르코 폴로>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마르코 폴로>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었던 역사적 인물을 로봇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백남준은 자신의 전시를 《전자 초고속도로: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로 정하고 동서양이 교류했던 역사적 고속도로와 전자 고속도로를 중첩 시킨다. 20세기의 <마르코 폴로>는 엔진 대신 꽃으로 장식된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이동한다. 마르코 폴로의 얼굴과 발은 붉은색 네온으로 만든 상형문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6대의 텔레비전으로 구성된 몸체에서는 동서양의 건축물의 이미지, 원자가 분열하는 듯한 추상적인 전자 이미지들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세계를 광대역 통신으로 연결하는 ‘전자 고속도로’를 달리며 미래뿐만 아니라 다양한 과거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백남준, <랜덤 액세스 오디오테이프>
백남준은 1963년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서 <랜덤 액세스>를 선보였다. 마그네틱테이프를 풀어내 여러 길이의 조각들로 잘라 벽면에 붙여 놓고 관람객이 재생 장치에서 분리된 금속 헤드로 원하는 테이프 부분을 훑어 녹음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 작품이다. 이후 1975년 뒤셀도르프 시립미술관의 전시 《보고 듣기》를 위해 백남준은 이 작품을 재제작하였다. 벽 대신 마그네틱테이프를 붙인 나무판과 재생 헤드를 연결한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로 구성되었고, 첫 번째 작품과 마찬가지로 관람객이 직접 테이프를 긁어서 소리를 재생할 수 있었다.
백남준 <연장선 있는 오디오테이프 헤드>
백남준은 1963년 부퍼탈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서 <랜덤 액세스>를 선보였다. 마그네틱테이프를 풀어내 여러 길이의 조각들로 잘라 벽면에 붙여 놓고 관람객이 재생 장치에서 분리된 금속 헤드로 원하는 테이프 부분을 훑어 녹음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 작품이다. 사용되었던 재생 헤드는 전시 이후 소실되었고, 1964년에 백남준이 다시 제작하였다.
백남준, <율곡>
백남준이 한국의 인물들을 주제로 하여 제작한 로봇 시리즈 중 하나로 16세기 유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를 형상화했다. 오래된 진공관 모니터로 머리를 만들었으며 가슴과 배에는 모니터를, 팔에는 공 모양의 안테나를 달고 있다. 그리고 마치 가부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둥근 라디오가 좌우 다리의 역할을 한다. 전체적으로 균형 있고 안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렇게 구성품의 생김새를 활용하여 신체의 동작이나 자세를 연상시키는 데에서 백남준 특유의 재치있는 조형감을 엿볼 수 있다. 일곱 대의 모니터에서는 부채춤을 비롯한 여러 비디오 영상이 화려하고 빠르게 재생되어 작품에 생기를 더한다. 한국의 역사적 인물이라는 과거의 컨텐츠를 텔레비전과 비디오를 이용해 로봇의 모습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백남준은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통해 역사적 인물을 재현하면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한자리에 모았다.
만프레드 몬트베, <실험 텔레비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부퍼탈
1963년 3월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번째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만프레드 몬트베가 찍은 실험 텔레비전 사진이다. 이 전시에서 백남준은 13대의 실험 텔레비전을 선보였는데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사전에 내부 회로를 물리적으로 조작하고 전자기적 신호를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동일한 방송 채널의 화면이 네거티브로 보이거나, 가로줄, 세로줄, 혹은 여러 형태의 곡선들이 화면을 방해하여 왜곡되어 보이도록 하는 텔레비전이다. 두 번째 종류는 텔레비전에 외부 장치를 연결하여 관람객의 참여에 의해 어떤 화면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연결된 페달을 밟거나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내면 이에 반응하여 화면에 불꽃 같은 이미지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또 각각 녹음기와 라디오가 연결된 텔레비전은 흘러나오는 음악과 라디오의 볼륨에 따라 화면이 달라지는 식이다. 마지막은 고장이 나서 화면에 가로선 하나만 나타나는 텔레비전으로 백남준은 이를 그대로 전시장으로 가져와 옆으로 세워 세로선으로 보이도록 놓았고, 고장 난 다른 한 대의 텔레비전은 아예 엎어 놓고 ‘‘렘브란트 오토매틱’이라는 상표를 부각시켰다. 몬트베는 실험 텔레비전들의 화면이 휙 지나가버리거나 계속 바뀌었고 상태가 불안정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이를 사진으로 찍는 것이 당시로서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만프레드 몬트베, <총체 피아노>,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부퍼탈
1963년 3월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번째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을 만프레드 몬트베가 찍은 사진이다. 이 전시의 한 부분은 〈총체 피아노〉라 이름 붙인 네 대의 장치된 피아노였는데, 그 중 두 대는 건반과 현 곳곳에 갖가지 사물들을 매달거나 부착하거나 끼워 놓았고 이들은 전선으로 뒤엉킨 채 연결되어 있었다. 관람객은 자유롭게 이 피아노들을 연주해 볼 수 있었는데, 건반을 누르면 생소한 소리가 들리거나 장치된 사물들이 움직이거나 주변의 조명등, 사이렌, 환풍기, 녹음기, 라디오 등이 작동되기도 했다. 사진은 갤러리의 주인인 롤프 예를링이 장치된 피아노를 작동시켜 보는 모습이다. 건축가였던 예를링은 자신의 건축사무소 건물에 1949년 갤러리 파르나스를 열고 1965년까지 160여 차례 전시와 공연을 개최했으며 특히 1960년대 초반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액션, 해프닝 공연을 많이 유치했다.
만프레드 몬트베, <입으로 음악 듣기>,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부퍼탈
1963년 3월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번째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만프레드 몬트베가 찍은 〈입으로 음악 듣기〉 사진이다. 골동품에 가까운 레코드 플레이어에서 카트리지를 분리해 모조 페니스처럼 보이는 장치를 끼우고 바늘을 레코드에 얹어 재생시킨 후 그 모조 페니스를 입에 물고 느껴지는 음반의 진동을 듣는 것이다. 소리를 내는 신체기관인 입을 소리를 듣는 기관으로 치환하면서 성적인 암시도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몬트베의 회고에 따르면 백남준이 특별히 찍어두고 싶은 사진이 있다고 요청하였고, 보는 사람이 없는 이른 아침에 백남준이 직접 연출하는 가운데 이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만프레드 몬트베, <음반 꼬치>,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부퍼탈
1963년 3월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번째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만프레드 몬트베가 찍은 〈음반 꼬치〉 사진이다. 전시장 지하실 공간에는 앰프, 스피커 기능이 있는 라디오 위에 턴테이블이 갖춰진 레코드 플레이어 한 대가 조립돼 있었다. 턴테이블의 축이 1미터 정도 높이로 위를 향해 길게 뻗어 있고 회전하는 이 축에 열 장의 레코드판을 꼬치에 꿰듯 임의의 간격으로 끼워 쌓았다. 그 옆에는 유사하게 기둥에 꿰어진 더미가 있고 이 꼬치는 첫 번째 꼬치와 고무벨트로 연결되어 같은 속도로 회전한다. 이렇게 두 개의 꼬치로 구성된 설치물이 두 벌 있었고, 관람객은 마그네틱 카트리지의 톤암을 들고 레코드판의 원하는 곳을 긁어 소리를 들었다. 음반들을 마치 케밥 꼬치처럼 꿰어 놓은 모양에서 ‘샤실리크(shashlik)’란 단어를 가져와 〈음반 꼬치〉라 제목을 붙였다. 토마스 슈미트, 페터 브뢰츠만이 이 작품을 시연 중인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있다.
만프레드 몬트베, 걸음을 위한 선,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부퍼탈
〈걸음을 위한 선〉은 바이올린, 숟가락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바닥에 끌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퍼포먼스로, 끌고 가는 물건에 따라 별도의 제목이 붙어있기도 하다. 같은 제목의 오브제 작품도 있는데, 실제 퍼포먼스에서 사용했던 낡은 샌들로, 작은 종과 사슬이 감긴 이집트 석조 두상이 매달려 있어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난다. 백남준은 이 샌들에 매달린 물건들의 의미에 대해 명확히 밝힌 바는 없지만, 돌 조각이 매달린 샌들은 고된 예술창작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물건들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로, 음악을 소음이나 침묵으로 확장시킨 존 케이지의 예술에 대한 오마주를 엿보게 한다.
백남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
존 케이지와의 만남 후 큰 영향을 받은 백남준은 예술적 존경의 의미로 1959년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에서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이라는 공연을 한다. 백남준은 이 때의 소리 콜라주를 담은 릴 테이프를 액자에 넣어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이라는 같은 제목의 작품을 남겨 놓았다. 릴 테이프에는 클래식 음악부터 일상의 소음까지 녹음해서 편집했는데, 클래식 음악으로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독일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등이, 비음악적인 소리로는 비명, 유리 깨지는 소리, 금속 상자 속의 돌 소리, 수탉 울음, 복권발표와 뉴스, 그리고 장치된 피아노의 소리 등이 녹음되어 있다.
백남준, <랜덤 액세스 — 중세 표기법>
내부 회로를 변형하여 13대의 실험 텔레비전을 선보인 1963년 백남준의 첫 번째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은 음악 분야에서 활동하던 백남준이 미디어 아티스트로 나아간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에서 백남준은 관객이 테이프 헤드를 이용하여 벽에 부착한 오디오 테이프를 훑으면서 소리를 듣는, 즉 청각을 시각화한 작품인 〈랜덤 액세스〉를 소개했는데, 이후에 전통적인 악보의 형식으로 다시 한 번 〈랜덤 액세스〉를 시각화한 동명의 작품을 제작했다.
만프레드 몬트베 <랜덤 액세스>,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갤러리 파르나스, 부퍼탈
1963년 3월 독일 부퍼탈의 갤러리 파르나스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번째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서 만프레드 몬트베가 찍은 〈랜덤 액세스〉 사진이다. 전시장 지하실 공간에 두 개의 무릎 높이대 위에 수평으로 60cm 길이의 판지 롤러가 모터로 돌아가고 있다. 롤러 위를 폭 50cm의 천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는데, 천 위에는 스풀로부터 풀어낸 녹음테이프를 여러 길이의 조각들로 붙여 놓았다. 이렇게 두 벌의 천 컨베이어 벨트가 놓여 있는 사이 중간 벽면에도 테이프 조각들을 붙여 놓았는데 마치 복잡한 도로 지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관람객은 재생 장치에서 분리된 금속 헤드로 이 설치물들에서 원하는 테이프 부분을 훑어 녹음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훑는 속도나 방향에 따라 비틀린 전자음악 같은 갖가지 소리가 났다. 기계가 순차적으로 재생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직접 몸을 움직여 임의의 원하는 부분을 듣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 작품은 〈랜덤 액세스〉라고 불렸다. 토마스 슈미트, 페터 브뢰츠만이 이 작품을 시연 중인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있다.
백남준, <나는 이 곡을 1954년 도쿄에서 썼다>
〈나는 이 곡을 1954년 도쿄에서 썼다〉는 백남준이 대학교 새내기 시절 작곡한 곡을 바탕으로 한다. 144개의 음표로 구성한 하나의 악장을 바탕으로 연주하는 곡이다. 이 곡을 1994년 작품에 반영한 것인데 18세기에 제작한 앤티크 음악 장치가 재생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악장을 다시 1950년대에 생산한 텔레비전의 화면에 나타나게 했다. 스크린 위에 나타난 몽롱한 이미지는 회전하는 뮤직 박스의 기계장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실제 기계장치가 아니라 텔레비전 내에 설치된 카메라에 의해 실시간으로 포착되어 투사한 이미지이다. 백남준은 현대적인 전자적 이미지를 우리에게 오래되었지만 친근한 텔레비전과 뮤직 박스의 전통과 결합하고,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 시, 그리고 다소간의 과장이 뒤섞인 대상을 창조한 것이다. 과거와 현재, 백남준이 작품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미래를 하나의 모니터 속에 보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남준, <퐁텐블로>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금색 도장을 한 나무 액자 안에 20대의 컬러 모니터가 배치되어 있고, 2-채널의 영상은 각각 고전 명화들의 이미지를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보여준다. 영상 속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그 윤곽만이 드러나거나, 때로는 중첩되고 왜곡되며 변화한다. “퐁텐블로”라는 제목은 프랑스의 퐁텐블로 성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성은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의 군주들이 머물렀던 화려한 거처로, 그림을 나란히 걸어놓는 공간인 갤러리의 원형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프랑수아 1세의 갤러리에는 〈퐁텐블로〉에 쓰인 것과 같은 화려한 금색 액자에 회화 작품이 걸려있다. “콜라주 기법이 유화를 대신했듯이, 음극선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라는 백남준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비디오를 통해 시간을 공간적으로 재조합하기를 즐겼던 백남준은 이 작품에서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빛의 원천 중 하나인 달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여준다. 초승달부터 보름달까지 달의 주기가 12대의 텔레비전으로 형상화되는데, 1965년 뉴욕 갤러리아 보니노에서 처음 선보일 당시에는 초기 진공관 텔레비전을 사용하였다. 백남준은 진공관 끝에 자석을 고정해 내부 회로의 전자기적 신호를 방해하고 그 신호만으로 텔레비전 화면에 마치 달처럼 보이는 여러 가지 모양이 나타나도록 한 것이다. 관람자는 시간의 길이와 깊이, 순간성과 영원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작품의 제목은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지구의 유일한 위성인 달을 바라보며 이미지를 투영하고 이야기를 상상하던 모습을 텔레비전 시청에 빗댄 것이라 할 수 있다. 백남준은 1976년부터 이 작품을 12대의 텔레비전을 사용하여 구성하였다. 백남준아트센터가 소장한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12개의 달에 〈E-Moon〉(1999)이라는 영상이 추가되어 13대의 모니터로 구성한 것으로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에서 처음 선보였던 버전이다.
백남준, <달에 사는 토끼>
백남준은 텔레비전이 갖고 있는 정보 매체로서의 풍부한 가능성을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달에 비유하며 〈달은 가장 오래된 TV〉(1965)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달에 사는 토끼〉는 달과 텔레비전을 하나의 정보 매체로 해석한 백남준의 여러 작품들 중 하나로 TV 모니터와 이를 바라보고 있는 토끼 나무 조각으로 구성된다.
백남준, <버마 체스트>
미얀마 스타일의 황금빛 궤의 상단부 문을 열면 여덟 대의 소형 모니터에서 영상이 나오고 양쪽 측면에서는 두 대의 프로젝터를 통해 여성의 누드와 샬럿 무어먼의 퍼포먼스 영상이 보여진다. 하단부 2단 서랍장에는 각종 장식물과 드로잉, 사진 등이 담겨있다. 궤의 서랍은 내밀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동시에 그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를 상징한다. 서랍장 곳곳에 스펀지 로봇과 철제 로봇, 동남아 양식의 청동 와불 등이 놓여 있다.
백남준, <실제 물고기/생방송 물고기>
나란히 놓인 두 대의 텔레비전 중 왼쪽의 TV 케이스 안에는 어항이 들어가 있고 그 속의 물고기를 폐쇄회로 카메라로 촬영해 오른쪽 모니터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사용된 TV 수상기는 1950년대 후반 필코사가 제작한 프레딕타 진공관 텔레비전 제품으로, 고굴절각 화면과 나무 콘솔 위에서 회전 고리로 돌릴 수 있는 독특한 구조 등으로 당시 미래의 텔레비전 디자인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어항을 닮은 수상기의 형태는 작품의 구도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이다. 제목을 ‘real’과 ‘live’라는 대구로 구성한 것은 일종의 백남준식 언어유희라고 할 수 있다. 영어의 ‘live’는 ‘생방송의’라는 뜻 외에 ‘살아 있는’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제목은 ‘실제 물고기 / 살아있는 물고기’라는 동어반복이 되어, 생방송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과연 ‘살아있는’ 것인지 되묻는 구조이다.
만프레드 레베, <타악기를 위한 마음>, 《반-축제, 》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아틀리에, 쾰른
쾰른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아틀리에에서 1960년 열린 《반-축제》에는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비롯해 실바노 부소티, 한스 G. 헬름스, 벤저민 패터슨, 윤이상, 크리스토프 카스켈, 데이비드 튜더, 백남준 등 많은 작가들이 참여했다. 사진 속 흰 셔츠를 입고 서 있는 인물인 부소티가 1959년에 작곡한 〈타악기를 위한 마음〉을 선보이고 있다. 그 옆에 앉은 이가 백남준으로 《반-축제》에서 백남준은 1959년 갤러리 22에서 했던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 테이프와 피아노를 위한 음악〉(1958)을 다시 한 번 공연했다.
백남준,TV 정원
우거진 수풀 속에 텔레비전들이 꽃송이처럼 피어있는 정원이다. 화면에 나오는 것은 〈글로벌 그루브〉(1973)라는 비디오 작품으로 세계 각국, 여러 분야의 음악과 춤이 백남준 특유의 편집으로 흥겹고 현란하게 이어진다.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종합하는 연속적인 줄거리 없이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보기를 권유하는 영상이다. 이 정원에서 TV 모니터들은 낯선 각도의 배치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관람자는 화면이 하늘을 향하거나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텔레비전을 내려다보게 되며, 하나의 텔레비전 수상기만을 보기보다는 주변의 여러 대를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미술관이라는 실내에 인공적으로 조성, 유지되는 자연 환경과, 자연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테크놀로지를 대변하는 텔레비전이 하나의 유기체적 공간을 이루고 있다. 나뭇잎을 타고 흐르는 텔레비전의 전자적 영상이 다양한 리듬 속에서 생태계의 일부가 됨으로써 백남준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픽셀의 자극과 자연이 내뿜는 초록빛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했다.